신인상주의의 등장
1884년 보수적인 살롱전에 반기를 들고 결성되었던 독립미술가협회(Société des Artistes Indépendants)는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앙데팡당전(Salon des indépendants)이라는 연례전을 개최하였습니다. 앙데팡당전은 일체의 심사절차 없이 참가비만 내면 누구나 자신의 작품을 전시할 수 있었고, 심지어 시상도 치러지지 않았습니다. 전례 없이 낮은 문턱을 자랑했던 이 전람회를 통해 인상주의 이후 근대미술의 본격적인 포문을 열었던 화가들이 대거 등장할 수 있었습니다. 독립미술가협회의 창시자 중 한 명이었던 조르주 쇠라(Georges Seurat, 1859~1891)는 1884년 살롱전에서 낙선되었던 작품 <아스니에르에서 물놀이하는 사람들>을 제1회 앙데팡당전에 출품하였고, 이를 계기로 자신과 공동의 예술적 기치를 추구하게 될 동료 폴 시냑(Paul Signac)을 만납니다. 이 둘은 1886년 인상주의의 마지막 그룹전에 함께 참여하였는데, 비평가 펠릭스 페네옹(Felix Fénéon)이 쇠라와 시냑의 작품을 보고 '신인상주의'라는 용어를 창시하였지요. 회화의 혁신을 불러일으켰던 인상주의의 아성이 차차 그 빛을 잃어가기 시작할 무렵, 그들이 구축한 계보 위에 또 다른 독자적인 노선을 일궈낸 이 젊은 화가들을 일컬어 '새로운 인상주의'라고 칭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빛과 색채를 순간적인 감각으로 치환했던 인상주의자들과는 달리, 쇠라와 시냑은 '광학'의 개념을 강조하며 보다 이론적인 접근방식을 취했습니다. 이를테면 '과학적인 인상주의'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과학자의 태도로
조르주 쇠라는 1878년 에콜 데 보자르에 입학하여 신고전주의 대표화가 앵그르의 제자 앙리 레만(Henri Lehman)에게 사사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내 답보적인 아카데미 화풍에 흥미를 잃고 자원입대하여 브레스트 지역 해안가에서 1년여간 병역의 의무를 수행하였습니다. 이후 파리로 돌아와 박물관을 다니면서 고전작품들을 연구하다가, 19세기에 등장한 색채와 선에 대한 이론에 깊이 매료되어 이에 관련된 서적들을 탐독하기 시작합니다. 무엇보다 화학자 미셸 외젠 셰브뢸의 색채 대조론, 미국 물리학자 오드겐 루드의 현대 색채론은 쇠라의 작업세계를 지탱하는 이론적인 토대가 되었습니다. 쇠라는 주변의 색에 따라 사물의 색채가 다르게 보인다는 굳건한 믿음을 견지하였으며, 물감은 혼합할수록 색이 탁해지는 반면 빛의 혼합은 명도가 더욱 높아진다는 사실에 주목하였습니다. 1881년에는 들라크루아의 작품에 대한 기나긴 분석의 글을 남긴 바 있는데, 쇠라는 그가 보색의 대비를 통해 시각적으로 중간톤의 색채를 만들어냈던 점을 각별하게 다루기도 했습니다. 이와 같은 이론들을 바탕으로 그는 대상을 단일한 색상이 아닌 여러가지 순색의 대비를 통해 묘사하고 하였습니다. 또한 팔레트 위에서 물감이 섞여 색채가 혼탁해지는 것을 방지하고자 작은 색점으로 화폭을 가득히 메우는 작업방식을 고안해냈습니다. 무수한 색점의 병치는 관람자의 망막 위에서 색채의 혼합을 이행시키는 효과를 창출하였습니다. 쉽게 말해, 빨간색과 노란색의 색점들이 교차되면 사람의 눈에는 주황색으로 감지되는 것 처럼 말입니다. 이를 통해 쇠라는 화면의 명도를 낮추지 않으면서도 중간색을 구현할 수 있는 방법을 발명한 것이지요. 이처럼 더할수록 밝아지는 빛의 속성을 색채에 적용하였다는 점에서 그는 자신의 기법을 '색광주의'라 명명하였습니다. 또한 그의 회화는 마치 모자이크를 연상시키는 색점의 병치로 인해 '점묘법'으로 불리거나, 색을 섞지 않고 점으로 분할하여 칠한다는 측면에서 '분할주의'라고 칭해지기도 합니다.
고전의 비례를 다시 화폭으로
직관과 감각을 중시했던 인상주의자들과 달리 쇠라는 체계적인 방식으로 구성된 회화를 선호했습니다. 1886년 인상주의의 마지막 그룹전에 전시되었던 <그랑자트 섬의 일요일>(1886)은 무려 60여점의 습작을 거쳐 제작된 대작으로 쇠라의 예술세계를 집대성한 것으로 평가되는 작품입니다. 센강 안에 위치한 그랑자트 섬의 여름 풍경을 묘사한 이 작품은 인상주의자들이 즐겨 채택했던 근대 여가생활의 단면을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작품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표정으로부터는 어떠한 감정도 읽어낼 수 없고, 모두 한결같이 정면, 측면, 후면을 향해 마네킨처럼 뻣뻣한 포즈를 취하고 있습니다. 쇠라는 인물들을 파르테논 신전의 프리즈(frieze) 부조의 조각처럼 묘사하고자 했다고 언급한 적 잇는데, 이를 통해 인상주의의 순간의 감각이 아닌 고전의 작품들로부터 우러나오는 위엄과 영속성을 보존하고자 하였던 것이지요. 나아가 그의 화폭은 명료한 수직과 수평의 구도로 구획되었으며, 선원근법의 적용으로 인해 원경으로 갈수록 인물의 크기가 점차 작게 그려지고 있습니다. 인물들의 신체비례 또한 머리가 몸의 1/7에 해당하는 비트루비우스의 비례를 충실히 따르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그가 화폭 안에 수학적 비례를 체계적으로 적용하고자 고심했던 흔적들은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쇠라의 회화는 동시대적 주제, 미술과 과학적 이론을 병합한 작업방식, 여기에 고전의 비례미까지 겸비하면서 인상주의와는 차별화된 그만의 독자적인 작업세계를 완성하게 됩니다. 쇠라의 말년에 제작된 <서커스 사이드쇼>(1888), <샤위>(1890), <서커스>(1891) 또한 근대의 풍속을 다루고 있으나, 수평과 수직 그리고 기하학적인 비례에 입각한 질서정연한 구도가 눈에 띕니다. 인물들 역시 한결같이 어딘가 부자연스럽고 기계적인 느낌을 선사하고 있음은 물론입니다. 전통과 근대의 공존은 주제적 측면에서도 나타났습니다. 1888년 제작된 <모델들>은 세 명의 여성들의 후면, 정면, 측면의 누드를 묘사하고 있는데, 이는 전통적으로 '삼미신'이라는 주제로 자주 다루어져 왔던 도상이었지요. 대신 쇠라는 여신이 있어야 할 자리에 화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세 명의 직업모델들을 그려 넣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쇠라는 31세라는 너무도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점묘법이라는 기법의 특성상 한 작품을 완성하는데 걸리는 시간에 다른 화가들에 비해 월등히 길기도 했고(<그랑자트 섬의 일요일>의 경우 2년에 걸친 제작기간이 소요되었습니다.) 짧은 생을 살았던 탓에 남겨진 작업의 수는 많지 않지만 쇠라는 역사상 가장 과학적인 자세로 회화세계를 일궈낸 화가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그의 태도는 20세기 초반 입체주의를 비롯한 기하추상이 본격적으로 태동할 수 있었던 기틀을 마련하였고, 그가 색채를 다루었던 기법은 반 고흐와 폴 고갱을 비롯해 앙리 마티스 등의 화가들에게도 많은 영감을 주었지요.
*사진출처
1.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6/67/A_Sunday_on_La_Grande_Jatte%2C_Georges_Seurat%2C_1884.png/2560px-A_Sunday_on_La_Grande_Jatte%2C_Georges_Seurat%2C_1884.png
2.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3/36/Georges_Seurat_066.jpg/2560px-Georges_Seurat_066.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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