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상주의를 떠나
후기 인상주의라는 용어는 1910년 영국의 비평가 로저 프라이(Roger Fry)가 기획했던 <마네와 후기 인상주의 화가들(Manet and Post-Impressionism)>이라는 전시를 통해 처음으로 등장했습니다. 로저 프라이는 후기 인상주의란 시기적으로 대략 1890년대 후반부터 1900년대 초의 미술 경향을 지칭하며, 인상주의에 근간을 두었으나 그로부터 탈피하여 각기 고유한 방향성을 모색했던 흐름이라고 정의하였습니다. 그러나 후기인상주의는 점차 폴 세잔(Paul Cézanne),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폴 고갱(Paul Gaugin) 이 세명의 화가를 가리키는 용어로 통용되기 시작합니다. 화가들이 주도적으로 집단적 움직임을 표방하며 결성된 유파가 아니었기에, 이들의 작품은 양식적으로 이렇다 할 공통점을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철저히 개별적인 노선을 취하고 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기 인상주의라 일컬어지는 화가들의 작업은 20세기 초 다양한 미술사조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발현될 수 있는 크나큰 밑거름이 되었다는 측면에서 매우 주요한 미술사적 의의를 지니고 있습니다.
주식 중개인에서 화가로
본업이 주식 중개인이었던 폴 고갱(1848~1903)은 35세라는 늦은 나이에 화가의 길로 입문하였습니다. 미술품 애호가였던 그는 아마추어 화가로 거듭나면서 인상주의의 스승 격 인물인 카미유 피사로(Camille Pissarro)와 친분을 쌓았고, 이를 계기로 1880년부터 인상주의 그룹전에 참가하게 됩니다. 1883년 고갱은 가족과 동료화가들의 거센 반대에도 불구하고 전업화가로 돌아설 결심을 합니다. 다섯 명의 자녀를 둔 가장으로서 생업을 포기하고 화가가 되겠다는 고갱의 선포는 사실상 가족의 생계를 위협할 정도로 다소 성급하고 무리한 결정이었습니다. 결국 생활고를 견딜 수 없었던 그의 아내는 아이들을 데리고 본국인 덴마크로 돌아가지만, 고갱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꿋꿋이 화가의 길을 걸어갑니다. 1886년 그는 인상주의의 마지막 그룹전에 무려 19점의 작품을 출품하면서 창작을 향한 불타는 그의 열의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조르주 쇠라(Georges Seurat)의 <그랑자트섬의 일요일>이 집중적인 관심을 받으며 쇠라가 인상주의의 뒤를 잇는 떠오르는 신예로 부상하면서 고갱의 그림들은 거의 빛을 보지 못합니다. 이에 크게 상심한 고갱은 인상주의로부터 탈피한 자신만의 독자적인 방향성을 간구하고자 합니다. 또한 생활고로 인해 파리의 도시생활에 지쳐버린 나머지 브르타뉴의 퐁타방지역으로 이주를 하였는데, 이곳에서 접한 토속적인 농민들과 토기류의 공예품들은 그로 하여금 문명사회를 벗어나 순수한 원시의 세계를 지향하게 되는 기폭제로 작용합니다.
폴 고갱과 빈 센트 반 고흐의 만남
1887년 고갱은 퐁타방에서 만난 동료화가 샤를 라발(Charles Laval)과 함께 순수한 원시의 세계를 찾아 파나마를 거쳐 마르티니크 섬으로 떠났습니다. 그러나 카리브해의 무덥고 습한 기후로 인해 이질과 말라리아에 걸리며 건강이 악화된데다가, 향수병까지 더해져 이듬해 다시 파리로 귀국하게 됩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원주민들의 움막에서 기거하며 마르티니크의 풍광을 그렸던 원시주의적 작품들은 비로소 파리 화단의 주목을 받습니다. 고갱은 그림상이자 빈센트 반 고흐의 동생인 테오도르 반 고흐와 본격적으로 거래를 시작하였고, 빈센트 반 고흐와도 깊은 교우 관계를 맺습니다. 이후 반 고흐와 고갱의 관계는 근현대미술사를 통틀어 가장 유명한 에피소드를 낳게 됩니다. 반 고흐는 화가들이 퐁타방지역에 모여 공동의 창작활동을 펼쳤던 모습을 몹시 동경했습니다. 그 또한 남프랑스 아를에서 함께 생활을 이어갈 동료화가들을 모집 중이었지요. 테오도르 반 고흐가 생활비를 부담한다는 약속을 전제로 고갱은 1888년 아를의 그 유명한 '노란 집'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반 고흐는 자신이 가장 좋아했던 해바라기 그림으로 고갱이 머물 방을 장식하면서 부푼 기대를 안고 그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고갱과 고흐의 동거는 단 9주 만에 막을 내리고 맙니다. 둘은 동거의 시작부터 그림에 대한 관점의 차이로 격한 논쟁을 벌이곤 했습니다. 고흐는 사실주의 화가 밀레를 추종하여 대상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묘사하는 것을 선호하였고, 고갱은 자신의 기억과 관념에 의거한 창작을 보다 중시하였습니다. 그림에 대한 견해뿐 아니라 성격과 생활방식의 극심한 차이로 인해 둘은 종종 갈등을 겪었으며, 사건의 그 날 격한 말다툼 끝에 반 고흐가 자신의 귀를 잘라버리는 기행을 벌이면서 둘의 사이는 완전히 파국을 맞게 됩니다. 반 고흐는 자른 귀를 종이에 싸서 고갱과 고흐가 알고 지냈던 매춘부 라셸에게 선물이랍시고 전해줍니다. 이를 보고 아연실색한 라셸은 경찰에 곧바로 신고를 하고, 노란 집으로 달려온 경찰은 침대 위에서 죽은 듯이 잠들어 있는 고흐를 발견하게 되죠. 고흐는 파리에서 한 걸음에 달려온 동생 테오도르의 간호를 받으며 일주일 가량 병원에 머물면서 간신히 정신을 차렸지만 지난날의 사건에 대해 명확한 기억을 떠올리지 못합니다. 그의 기행은 정신질환으로 인한 발작증세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날의 사건에 대해 고갱은 고흐가 면도칼을 들고 자신을 위협했다고 진술했지만, 두 화가 모두 세상을 떠나버린 지금 정확한 진실이 무엇인지 확인할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일각에서는 몸다툼 중에 실수로 고흐의 귀를 베어버린 고갱이 도망을 쳐버렸다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하지만 , 이 또한 어디까지나 가설일 뿐이지요. 확실한 것은 고흐가 이미 공동체 생활에 질려 마음이 떠나버린 고갱을 필사적으로 붙잡으려 했다는 사실입니다. 고갱이 떠나기 전 반 고흐가 동생 테오도르에게 보낸 수 차례의 편지를 통해서도 이러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미 자신을 떠나 파리로 가 버린 고갱에게 원한다면 언제든 다시 함께 생활을 시작할 수 있으며, 여전히 많이 좋아하고 있다는 거의 연서에 가까운 내용의 편지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고흐의 귀 절단 사고 이후 둘은 결코 재회하지 않았지만, 고갱에게도 그 사건이 워낙 뇌리에 강렬하게 남았던 탓인지 후에 귀에서 피를 흘리는 모습을 한 남자를 그린 도자기를 만들기도 했다고 하지요. 고흐와 고갱의 일화는 아를의 지역 신문에도 실릴정도로 당시에도 큰 파문을 불러 일으켰던 사건이었습니다.
*사진출처
1.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a/a8/Paul_Gauguin_087.jpg/1546px-Paul_Gauguin_087.jpg?20200824104826
2.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3/3f/Vincent_van_Gogh_-_Paul_Gauguin_%28Man_in_a_Red_Beret%29.jpg/1024px-Vincent_van_Gogh_-_Paul_Gauguin_%28Man_in_a_Red_Beret%29.jpg
'History of Art' 카테고리의 다른 글
폴 고갱, 순수한 원시의 세계로 (2) (0) | 2023.03.06 |
---|---|
비가시적이고 불가해한 세계를 향해, 상징주의 미술 (0) | 2023.02.15 |
조르주 쇠라, 망막 위에서 완성되는 색채의 혼합 (0) | 2023.02.13 |
물랑루즈의 화가, 앙리 드 툴루즈-로트렉 (0) | 2023.02.07 |
근대 조각의 선구자, 오귀스트 로댕(3) (0) | 2023.02.03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