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History of Art

비가시적이고 불가해한 세계를 향해, 상징주의 미술

by 2become5 2023. 2. 15.
반응형

귀스타브모로
<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 귀스타브 모로, 1864, 캔버스에 유채

 

정신과 상상력의 복권


19세기 후반 과학의 진보와 산업혁명의 발발은 당대 예술계의 판도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미술과 문학은 모두 종교와 신화로부터 눈을 돌려 동시대의 현실을 직시하기 시작했고, 그것으로부터 주력한 소재를 차용했습니다. 사실주의 미술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가감 없이 기록하는 것을 목표로 '진실'을 추구했으며, 인상주의는 종교화와 역사화로부터 탈피해 오로지 근대의 풍속만을 담아냈습니다. 더 나아가 신인상주의의 기수들은 미술에 과학적인 이론을 접목하기까지 하였지요. 이에 반해 19세기말부터 20세기 초 프랑스를 중심으로 점차 유럽 전역으로 퍼졌던 상징주의는 인간의 내면과 정신, 상상력 등의 비가시적 세계를 다시금 화폭에 불러들였던 미술운동입니다. 급속한 산업화로 농촌의 인구가 도시로 대거 유입되면서 삶의 근간이 송두리째 흔들리게 된 사람들이 과거의 것과 상상으로부터 정신적인 위안을 얻으려 했던 사회전반의 정서적 기류 또한 상징주의의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처럼 이성과 합리성으로 점철된 물질주의와 산업화, 그리고 이에 물든 예술에 대한 반발로 촉발되었던 상징주의의 움직임은 문학장르에서 가장 먼저 시작되었습니다. 상징주의라는 용어는 1886년 시인이자 비평가인 장 모레아스(Jean Moréas)가 <피가로>지에 기고했던 글 '상징주의 선언'에서 처음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후 시의 음악미를 강조했던 에드거 앨런 포(Edgar Allan Poe)의 유지를 받들었던 샤를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를 위시해 시 문학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상징주의는 당대 사실주의 문학을 배격하면서, 암시와 상징, 환기를 통해 형이상학적이고 신비한 주제를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이후 미술분야에서 처음으로 상징주의에 대한 공식적인 논평이 이루어진 것은 1891년 비평가 조르주 알베르 오리오(Georges-Albert Aurier)의 글 <회화에서의 상징주의 : 폴 고갱>을 통해서였습니다. 상징주의 미술 또한 문학과 마찬가지로 비가시적이고 불가해한 인간의 내면세계와 무의식, 상상 등을 그려내고자 했습니다. 또한 질병, 죽음, 공포, 불안, 환상, 성(性) 등의 전에 없던 난해한 주제들을 몽환적이고 무언가 불길한 느낌을 주는 묘한 분위기로 담아냈습니다. 그러나 상징주의란 사실상 눈에 보이는 세상 너머 그 어딘가를 추구하는 정신과 태도를 지칭하는 용어이기에, 상징주의 범주로 분류되는 많은 화가들의 작품으로부터 양식상의 일관성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 특징이기도 합니다.

귀스타브모로
<환영>, 귀스타브 모로, 1876, 종이에 수채

 

상징주의의 선구자, 귀스타브 모로



귀스타브 모로(Gustave Moreau, 1826~1898)는 상징주의 미술운동이 공식적으로 출범하기 이전부터 이미 그 정신을 실천하고 있던 화가입니다. 에콜 데 보자르에서 수학했던 모로의 초기 스타일은 외젠 들라크루아(Eugène Delacroix)와 테오도르 샤세리오(Theodore Chasseriau)의 영향을 받은 낭만주의적 성향이 짙게 드러났습니다. 이후 낭만주의적 화풍에 고전주의 양식의 결합을 시도하였으나 화단의 주목을 받는 데는 실패하였지요. 당대 많은 화가들이 그러했듯 모로 역시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르네상스 대가들의 작품을 연구하였는데, 무엇보다 그의 눈길을 사로잡았던 것은 원시 화가들의 그림과 도자기, 비잔틴 시대의 모자이크화 및 에나멜화였습니다. 이탈리아 여행에서 돌아온 그는 <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를 제작하였고, 이를 1864년 살롱전에 출품하면서 점차 이름을 알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스핑크스는 자신의 앞을 지나가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내고 그것을 맞추지 못하는 사람들을 죽였던 반인반수입니다. 그러나 아리따운 여인의 얼굴을 한 모로의 스핑크스는 오이디푸스의 몸에 매달려 그를 유혹하는 모습으로 신화의 내용과는 달리 어딘가 성적인 긴장감을 유발하고 있습니다. 그의 작품들은 이처럼 고전의 도식화된 표현으로부터 벗어나 에로틱하고 다소 불길한 느낌을 자아내며, 남성을 유혹하여 죽음으로 모는 여성, 즉 팜 파탈(femme fatale)의 이미지가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팜 파탈의 이미지가 가장 단적으로 드러나는 작품은 <환영>(1876)입니다. 분봉왕 헤롯 앞에서 유혹적인 춤을 추고 왕의 마음을 빼앗은 후, 이에 대한 대가로 세례요한의 목을 요구했던 살로메라는 성서 속 여인을 다룬 이 작품은 관능성을 무기로 남성의 목숨을 좌지우지했던 팜 파탈의 전형적인 이미지가 되었지요. 성서 속의 일화를 다루었지만 비잔틴 교회와 이슬람 사원을 동시에 연상케 하는 근본을 알 수 없는 이국적인 배경 또한 그림 속 야릇한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키죠. 1884년 소설가 조리스 카를 위스망스(Joris Karl Huysmans)는 귀족 가문의 후계자가 권태와 무기력에 빠져 심미적 퇴폐에 침잠하는 내용을 다룬 소설 [거꾸로(A Rebours)]를 발간하였는데, 소설 속 주인공이 모로의 작품 <환영>을 손에 넣는 장면이 묘사됩니다. 살로메의 기이하고 초인적인 모습에 매혹된 주인공은 모로를 "현대예술의 유일무이한 화가"로 칭송하였고, 이를 계기로 모로는 상징주의의 성인이자 아버지로 추앙받기 시작합니다. 신화와 종교라는 전통적인 주제를 빌어 이에 자신만의 상상력을 더해 신비하고 몽환적인 화풍을 구축했던 모로는 자신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과 느끼는 것'만을 믿는다는 발언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모로는 66세의 늦은 나이에 에콜 데 보자르의 교수가 되었고, 노년에는 후학을 양성하는데 보다 집중하였습니다. 그는 제자들에게 정형화된 양식을 강요하지 않고 각자의 개성을 찾아 고유한 작업세계를 일궈나갈 것을 독려하였던 선망받는 스승이었다고 전해집니다. 모로의 제자 중에는 후에 야수파의 선두주자가 되는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와 종교화가로 유명한 조르주 루오(Goerges Rouault) 등이 있으며, 20세기에 등장한 초현실주의 운동의 이론가 앙드레 브르통(Andre Breton)은 구스타브 모로를 일컬어 초현실주의의 선구자라고 칭송하기도 하였지요.





*사진출처

1.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8/85/Oedipus_and_the_Sphinx_MET_DP-14201-023.jpg/800px-Oedipus_and_the_Sphinx_MET_DP-14201-023.jpg
2.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6/6c/The_Apparition%2C_Gustave_Moreau_1876.jpg/1024px-The_Apparition%2C_Gustave_Moreau_1876.jpg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