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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of Art

근대 조각의 선구자, 오귀스트 로댕(3)

by 2become5 2023. 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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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귀스트로댕
<지옥의 문>, 로댕, 1880~1917

단선적인 내러티브의 단절


19세기 팬터그래프(pantographe)라는 기술의 발명으로 조각가들은 작품의 크기를 확대하거나 축소하여 얼마든지 재생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로댕 역시 이러한 기술에 힘입어 하나의 작품을 다양한 크기로 변용하여 양산하였지요. 또한 로댕은 각기 다른 작품들을 결합하여 새로운 작품으로 만들어내는 마코타주(marcottage) 방식을 자주 사용했는데, 이는 조각가로 데뷔하기 전 그가 오랫동안 종사했던 건축 장식업을 통해 습득한 기술이었습니다. 마코타주는 여러 가지 물건들을 한데 모아 작품으로 제작하는 현대미술의 기법인 아상블라주(assemblage)의 시초가 됩니다. 로댕의 예술세계를 집대성했다고 평가되는 <지옥의 문>은 팬터그래프와 마코타주의 기술이 광범위하게 적용된 예입니다. 1880년 로댕은 프랑스 정부로부터 불타버린 감사원 자리에 새로 세워질 장식 미술관의 정문조각 제작을 의뢰받습니다. 이에 그는 단테의 신곡 중 지옥편으로 영감을 받은 <지옥의 문>을 구상하였지요. 그러나 1885년 미술관의 건립계획이 백지화되면서 로댕은 이 작업을 팔지 않고 스스로 보유하였고, 죽는 날까지 지속적으로 수정을 가하였으나 끝내는 미완으로 남게 됩니다. <지옥의 문>이 청동으로 주조되어 세상에 빛을 본 것은 로댕의 사후 10년의 시간이 지나서의 일입니다. 장장 30년이라는 기나긴 작업 시간을 거친 이 대작은 높이가 약 6.5m, 폭은 4m에 달하며 시인 단테로 분한 <생각하는 사람>을 필두로 무려 190여 개의 인물상이 등장합니다. 로댕의 대부분의 작품들의, 이른바 미니어처 버전의 조각상들이 거의 모두 투입된 하나의 작은 박물관이라 할 수 있지요. 신곡의 지옥편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사실상 이에 해당하는 일화는 <우골리노와 아이들>, <파올로프와 프란체스카> 단 두 개뿐입니다. 그 외 저마다의 고통과 번민으로 몸부림치는 인물상들은 대부분 기존에 제작된 작업들을 제목만 바꾸거나 마코타주 방식으로 재탄생시킨 것들이었습니다. <생각하는 사람>은 이름만 달리하여 <시인>이 되었고, <아담>이라는 제목의 조각상이 세 개로 붙여져 <세 그림자>라는 이름으로, <우골리노의 아이들>에 등장한 아들의 얼굴이 <파올로프와 프란체스카>의 파울로프의 얼굴이 되기도 하는 식이었죠. 심지어 <순교자>라는 작품은 <지옥의 문>에 무려 10번이나 재등장하며 반복을 거듭하기도 합니다. 나아가 패널을 구획하여 지옥편 각각의 일화를 순차적으로 전개하려 했던 애초의 계획과 달리 로댕은 최종적으로 패널을 제거하였고, 그로 인해 인물군상이 서사와의 연계성 없이 혼잡하게 섞여버리고 맙니다. 이처럼 작품의 재등장과 무분별한 반복, 그리고 무질서한 배치는 관람자들로 하여금 단테의 신곡을 연상케 하는데 적지 않은 혼란을 선사하게 됩니다. 즉, 서사의 단선적이고 논리적인 흐름이 단절됨으로써 시각예술의 가장 일차적인 목표로 간주되었던 명료한 의미의 전달이 끊겨버린 것이지요. 그간 관람자와 작품 사이를 매개했던 '명확한 서사'라는 다리가 사라지자, 관람자들은 작품과 또 다른 소통 방식을 간구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다시 말해, 눈에 보이는 그대로 명료하게 인식할 수 있었던 기존의 시점으로부터 벗어나 이제는 받아들이는 입장에서 본인 나름의 새로운 의미를 창출해야만 하는 의무가 부과된 것입니다. 근대조각을 향해 가는 발돋움이 되었던 로댕의 혁신성이 지금의 우리가 현대미술을 난해하게 느끼게 하는데 어느정도 기여를 했다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카미유클로델
<성숙의 시대>, 카미유 클로델, 1889


로댕의 여인들

 

카미유 클로델(Camille Claudel, 1864~1943)의 나이 19세에 시작된 로댕과 그녀와의 관계는 단순한 사제지간을 넘어 서로에게 영감을 주는 뮤즈이자 연인으로 급속히 발전하였습니다. 클로델은 <칼레의 시민>과 <생각하는 사람> 외 다수의 작품 제작에 동참하였고 수 차례 그의 모델이 되어주기도 했습니다. 클로델과의 만남을 기점으로 로댕의 작업에 성과 관능에 대한 심층적인 묘사가 더욱 본격화되기도 하였지요. 그러나 로댕의 옆에는 그를 보필하는데 한 평생을 헌신했던 로즈 뵈레(Rose Beuret)라는 여성이 있었습니다. 로댕과 사실혼 관계였던 뵈레는 침모(남의 집에 고용되어 바느질을 도맡아 하는 여성)출신으로 한 시대를 이끌어가는 저명한 예술가의 위상에 부합하는 여인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로댕이 뵈레를 떠날 수 없었던 이유는 로댕의 말마따나 그녀의 '동물적인 충성심'때문이었습니다. 1889년 클로델이 제작한 <성숙의 시대>를 본 로댕이 큰 분노를 표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흉측한 얼굴을 한 늙은 여인의 손에 이끌려 떠나는 남성에게 무릎 꿇고 애원하는 젊은 여인의 모습이 누가봐도 로댕과 뵈레, 클로델의 삼각관계를 형상화 한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뵈레와 자신의 사이를 오가면서 동시에 다른 여성들과도 숱한 염문을 뿌리고 다녔던 로댕에게 질려버린 클로델은 독립적인 조각가로 인정받고자 그의 수하를 벗어나기로 결심합니다. 로댕의 곁을 떠난 클로델은 그렇게 한동안 작품제작에 깊이 몰두하였으나 세간은 그녀의 작품이 지나치게 관능적이며 그저 로댕의 모사에 지나지 않는다고 평가절하하였죠. 이에 따른 재정적인 곤란과 더불어 점차 사람들로부터 고립된 삶을 자처했던 클로델은 급기야 로댕이 자신의 모든 것을 앗아가고 망쳐버렸다는 피해망상에 휩싸이게 됩니다. 정신질환의 증세가 본격화되면서 상당수의 작업들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파괴해 버리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지요. 1913년 클로델의 가족 중 유일하게 그녀를 지지했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남은 가족들은 가차 없이 클로델을 정신병원으로 보내버립니다. 그렇게 무려 30년이라는 긴 시간을 정신병원에 수감되어 홀로 고독하게 보냈던 클로델은 사망 후 무연고자로 처리되어 현재는 무덤조차 남아 있지 않다고 합니다. 그러나 로댕은 불멸의 연인이었던 클로델을 잊지 않고 나라에서 자신의 박물관을 건립하게 된다면 그녀의 작품들을 소장할 수 있는 공간을 따로 마련해 줄 것을 부탁했다고 하죠. 지금도 로댕 박물관에 가면 얼마 남지 않은 그녀의 유작들을 볼 수 있습니다. 1951년 비로소 클로델의 첫 회고전이 열리며 그녀에 대한 미술사적인 재평가가 이루어졌고, 1984년에는 카미유 클로델의 남동생인 폴 클로델의 손녀가 자신의 고모할머니에 대한 전기를 발간하면서 다시 한번 매체의 주목을 받습니다. 이후 그녀의 삶이 몇 차례 영화화 되기도 하면서 이제는 로댕에 필적할 만큼 친숙한 인사가 되었지요.

 

-사진출처
1.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6/69/Z%C3%BCrich_-_Kunsthaus_-_Rodin%27s_H%C3%B6llentor_IMG_7384_ShiftN.jpg/800px-Z%C3%BCrich_-_Kunsthaus_-_Rodin%27s_H%C3%B6llentor_IMG_7384_ShiftN.jpg?20110806224026
2.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6/6f/L%C3%A2ge_mur_%28Mus%C3%A9e_Rodin%29_%284921654776%29.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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