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동시대>, 로댕, 1875-1876
장식공에서 조각가로
18세기 이래 건축의 일부를 장식하는 기능으로 전락했던 조각이 다시 예술의 지위와 장르의 자율성을 획득하는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은 단연코 오귀스트 로댕(Auguste Rodin, 1840~1917)입니다. 그가 근대 조각의 아버지라 불리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지요. 한 편의 영화와도 같이 질곡이 많았던 로댕의 삶 또한 그의 신화를 더욱 극적으로 만드는데 일조하였습니다. 하급관리의 아들로 태어난 로댕은 14세에 국립공예실기학교에 입학하여 조각가로서의 기초를 다졌으나, 1857년부터 세 차례 연달아 국립미술학교 에콜 데 보자르의 입학시험에서 낙방을 합니다. 이후 갖가지 부업으로 생업을 이어가며 야간 제작에 몰두하다가 1862년 사랑하는 누이의 사망에 충격을 받고 수도원으로 들어가 사제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그러나 로댕의 실력을 안타깝게 여겼던 신부의 설득으로 발걸음을 돌려 다시 작업장으로 돌아오게 되죠. 가족들을 부양하기 위해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던 로댕은 건축 장식업에 몸을 담습니다. 그리고 1870년 보불 전쟁에 참전하였다가 제대 후 벨기에 브뤼셀로 이주하여 그곳에서도 7년여간 장식 조각을 제작하는 일을 이어갔습니다. 건축 장식공으로 일하면서 유럽 각지를 여행하던 중 이탈리아에서 미켈란젤로를 비롯한 르네상스 대가들의 걸작을 목도하고 큰 감동을 받은 그는 그간 자신의 모든 경험과 영감을 총동원하여 남자 누드 입상인 <청동시대>를 완성합니다. 우여곡절 끝에 이 작품이 1877년 살롱전에 전시되면서 비로소 조각가로서의 로댕의 커리어가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이상화되지 않은 인물표현
<청동시대>가 세간의 이목을 끌게 된 경위는 흥미롭게도 작품의 제작 방식을 둘러싼 스캔들에 있었습니다. 브뤼셀의 한 잡지 기사에서 이 작품이 모델을 있는 그대로 석고형을 떠서 만든 것이라는 의문을 제기한 것입니다. 기존의 그리스 조각상과는 다르게 자연스러우면서도 다소 애매한 포즈, 등신대의 크기와 피부의 거친 질감 표현에 이르기까지 이 조각상의 남성이 어딘가에 실재할 것 같은 무명의 누군가를 연상케 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만큼 생명력이 느껴진다는 뜻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실제로 살아 있는 사람의 본을 뜨지는 않았지만, 로댕은 조각에 생동감을 부여하기 위한 방편으로 인위적인 포즈에 능한 전문 모델이 아닌 일반인을 모델로 기용했습니다. 본래 '패배한 군인'이라는 제목을 염두에 두고 제작되었던 <청동시대> 역시 22세의 벨기에 군인에게 포즈를 취하도록 한 것이었죠. 1864년 살롱전으로부터 전시가 거부되었던 <코뼈가 부러진 남자> 도 자신의 작업실에서 허드렛일을 맡아하던 비비(Bibi)라는 노인을 모델로 한 작품입니다. 처음부터 이 작품의 코가 부러진 것은 아니었으나 후에 조각의 일부분이 떨어져 나갔고, 로댕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작품의 망가진 모습 그대로 살롱전에 출사표를 던졌습니다. 물론 예술이라는 성역을 침범한 날 것 그대로의 모습을 한 일반인의 출현을 곱게 받아들일 리 만무했던 비평가들은 인물의 용모가 고상하지 않고 지나치게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거부감이 든다며 혹평을 쏟아냈습니다.
로댕의 이상화되지 않은 인물 묘사의 정점은 프랑스의 대문호인 오노레 드 발자크(Honore de Balzac)를 제작했던 조각상에서도 드러납니다. 1891년 로댕은 프랑스 문인회의 회장인 소설가 에밀 졸라(Emile Zola)로부터 발자크의 사망 40주기를 맞아 그의 기념비를 제작해 줄 것을 의뢰받습니다. 계약된 제작 완료시점으로부터 무려 5년이나 지난 후에 공개된 발자크의 입상은 당시 비평가들 뿐 아니라 제작을 의뢰했던 문인회로부터도 인수가 거부될 정도로 맹렬한 비난의 폭격을 받았습니다. 발자크의 몸은 마치 거칠게 솟아 오른 바위 덩어리처럼 보였으며 덩어리 위에 무심히 얹혀진 듯한 커다란 그의 얼굴로부터는 대문호의 위엄과 영웅적인 면모를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지요. 그러나 무려 7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발자크의 생애와 작품에 대해 끊임없이 연구하고 수많은 습작을 만들어 내며 이 작품에 심혈을 기울였던 로댕이 궁극적으로 구현하고자 했던 것은 바로 발자크라는 인물이 지닌 그만의 고유한 개성과 내면세계에 있었습니다. 그저 두꺼운 바위 덩어리처럼 보일 정도로 세부묘사가 배제된 발자크의 몸은 실제로 그가 집필 시 즐겨 입었던 커다란 망토를 휘감은 모습입니다. 평단의 거센 비난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발자크의 제자들은 로댕의 작품을 보고 늦은 밤까지 글을 쓰다가 잠시 창가에 서서 사색에 잠긴 스승의 모습을 눈앞에서 보는 것 같다며 환호했다는 여담이 전해집니다. 이처럼 대상의 있는 모습 그대로의 생명력을 담아내고자 했던 로댕의 작품들은 한동안 장식적 기능에 머물렀던 조각의 예술적 지위를 복권하면서 정형화된 관습으로부터 탈피하여 근대조각을 향해 나아가는 새 지평을 열게 됩니다.
-사진출처
1.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7/77/Rodin_The_bronze_age.jpg
'History of Art'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근대 조각의 선구자, 오귀스트 로댕(3) (0) | 2023.02.03 |
---|---|
근대 조각의 선구자, 오귀스트 로댕(2) (0) | 2023.02.01 |
여성의 영역을 그린 인상주의자, 메리 카사트 (0) | 2023.01.27 |
도시의 산책자, 귀스타브 카유보트 (0) | 2023.01.26 |
모호한 인상주의자, 에드가 드가 (0) | 2023.01.25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