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상주의의 유일한 미국 화가
메리 카사트(Marry Cassatt, 1844~1926)는 인상주의 운동에 가담했던 유일한 미국인입니다. 금융업과 부동산업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 집안에서 출생한 그녀는 유럽 곳곳을 여행하며 풍요로운 유년시절을 보내다가, 펜실베이니아 미술학교에서 수학하면서 본격적으로 직업 화가로서의 꿈을 품습니다. 19세기 후반 여성들에게 미술은 그저 사교계로의 진출을 위한 교양수업일뿐이라는 인식이 팽배했던 것에 반해 화가를 본업으로 삼고자 했던 카사트의 포부는 당시로서 매우 파격적인 것이었습니다. 부모의 거센 반발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1866년 유럽으로 유학길을 단행하여 1874년부터는 파리에 완전히 정착하게 됩니다. 그러나 당시 외국인 여성의 신분으로 그녀가 프랑스의 국립 미술학교인 에콜 데 보자르에 입학할 수 있는 방도는 없었습니다. 이에 카사트는 화가의 아뜰리에를 찾아 개인 교습을 받거나 루브르 박물관을 수시로 드나들면서 대가들의 작품을 모사하며 스스로 실력을 습득해 나갔습니다. 그러던 중 에드가 드가와의 교우를 발판으로 1878년부터 인상주의 그룹전에 지속적으로 참여하게 되었죠. 나아가 카사트는 본국인 미국의 화단에도 인상주의를 전파하기 위해 노력하였고, 부유한 컬렉터들에게 인상주의 작품을 구매할 것을 적극 권하기도 했습니다. 드레퓌스 사건을 계기로 드가가 반유대주의적 견해를 표출하기 전 까지 카사트는 인상주의 멤버 가운데서도 특히 드가와 두터운 친분관계를 유지했습니다. 드가는 카사트에게 에칭 기법을 전수하기도 했고, 두 화가 모두 정확한 소묘 능력을 중시하고 파스텔을 즐겨 사용했다는 점에서 작업적 유사성을 보였습니다. 비록 여성혐오자로 널리 알려진 드가이지만 그가 예외적으로 카사트의 실력만은 매우 높이 샀었다고 합니다. 그녀를 일컬어 자신과 비슷한 감각을 가진 인물이라 칭송(?)했다고 하죠. 비록 '여자치고는'이라는 쓸데없는 말을 습관적으로 덧붙이긴 했지만 말입니다.
여성의 공간, 가정
많은 인상주의자들이 쉼 없이 파리의 대로와 뒷골목을 누비며 시끌벅적한 도시의 생동감을 묘사했던 것에 반해, 여성화가였던 카사트가 그당시 마음 놓고 그릴 수 있는 영역은 오로지 가정에 한정되었습니다. 부르주아 계층의 어엿한 부녀자들이 남성과 동행하지 않고 홀로 거리를 다닌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죠. 남성들만의 공적인 영역인 카페, 레스토랑, 무도회장 등의 장소를 여성이 드나들며 그림을 그리는 것은 더더욱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혈연관계가 아닌 남성과 단 둘이 있는 것조차 금지되었을 정도로 보수적이었던 사회 분위기 가운데 카사트가 그나마 동료들과 마음 편히 교류할 수 있던 장소는 오로지 미술관뿐이었습니다. 그녀가 아이와 함께한 어머니의 모습과 아이들을 자주 그렸던 것은 물론 가장 친숙한 주제여서기도 하지만, 이처럼 여성들에게 억압적이었던 사회 풍토의 요인 또한 결코 배제할 수 없습니다. 아이와 함께 있는 어머니의 모습은 전통적으로 성모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그린 '성모자'의 모티브로 자주 다뤄졌던 주제입니다. 그러나 카사트의 시선에 포착된 어머니와 아이는 성스럽고 엄숙한 분위기를 벗어나 서로 부둥켜안고, 볼을 맞대며 온기를 나누는 보다 친밀하고 따뜻한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친밀한 어머니와 아이의 도상은 일본의 목판화 우키요에의 주제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기도 합니다. 사랑이 넘치는 관계를 애정어린 시선으로 묘사한 모든 그림들이 그러하듯, 카사트의 작품 또한 보는 이들에게 변치 않는 따뜻한 온기를 전해주어 지금까지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죠.
페미니스트로서의 인식
어머니와 아이들의 모습을 즐겨 그렸던 그녀였지만 정작 카사트 본인은 결혼을 하지 않고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습니다. 일찍이 카사트는 결혼생활과 커리어가 결코 균형적으로 양립할 수 없다는 의견을 자주 피력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카사트는 1840년경 부터 태동하기 시작한 페미니즘의 기류에 민감히 반응했습니다. 비록 작품을 통해 자신의 견해를 드러내진 않았으나, 공공연하게 여성의 인권 신장을 주창하며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여성이 본격적으로 일을 하기 시작하면 사회의 인정을 받기 위해 싸울 필요가 없어질 것이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죠. 1915년에는 미술 수집가인 루이진 헤이브마이어(Louisine Havemeyer)에 의해 개최된 여성의 참정권 확보를 촉구하는 전시회에 18점의 작품을 출품하면서 페미니스트로서의 본격적인 행보를 보여주었습니다. 1910년경부터 대중매체를 통해 등장하기 시작한 '신여성(New Woman)'은 가정과 어머니라는 한정된 공간과 역할로부터 벗어나 경제적인 독립을 성취하고 남성들의 전유물이라 여겨졌던 사회의 공적 영역을 활보했던 일군의 여성들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메리 카사트는 이런 신여성의 표상 그 자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가부장제의 억압적인 굴레와 속박으로부터 여성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목소리를 높였던 그녀의 행보는 페미니즘 운동의 시초격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사진출처
1.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7/72/Mary_Cassatt_-_The_Child%27s_Bath_-_Google_Art_Project.jpg/786px-Mary_Cassatt_-_The_Child%27s_Bath_-_Google_Art_Project.jpg
2.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6/6a/Mary_Cassatt%2C_Reading_%E2%80%9CLe_Figaro%E2%80%9D%2C_1878%2C_Collection_Mrs._Eric_de_Spoelberch%2C_Haverford%2C_Pennsylvania.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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