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보다 후원자로 더 알려진 인상주의자
1873년 에콜 데 보자르에 입학 후, 1875년 살롱전에 첫 출사표를 던졌던 귀스타브 카유보트(Gustave Caillebotte, 1848~1894)는 자신의 작품을 향한 비평가들의 날 선 비난을 계기로 주류 미술계로부터 돌아서 인상주의자들과 궤를 같이 하기로 결심합니다. 1876년 에드가 드가를 통해 인상주의 화가들과 친분을 쌓은 뒤 이후 다섯 차례의 그룹전에 동참하였죠. 부호의 집안에서 출생한 덕택으로 그는 작품을 판매하여 경제적 이득을 취하는 것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또한 궁핍했던 동료화가들의 작품을 선뜻 구매하며 아낌없는 재정적 지원을 베풀었고, 그로 인해 카유보트는 인상주의 화가라기보다 그들의 후원자이자 미술 수집가로 보다 널리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실제로 카유보트는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을 무려 67점이나 소유하고 있었으며, 그의 사후 프랑스 정부에 기증된 이 작품들은 현재 오르세미술관 인상주의 컬렉션의 중핵을 이루고 있습니다. 사실 인상주의 화가로서의 카유보트의 존재감은 다소 미미한 편입니다. 46세에 세상을 뜬 데다 34세라는 이른 나이에 이미 화업을 중단했기 때문이기도 하죠. 또한 그의 작품은 전반적으로 인상주의 화풍보다는 사회의 실상을 객관적으로 기록하는데 주안점을 두었던 사실주의 미술의 면모가 더욱 강하게 드러나기도 합니다. 1875년 살롱전에 출품하여 노동의 현장을 이상화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천박하다는 혹평을 받았던 <대패질을 하는 사람들> 역시 이전에는 다뤄지지 않았던 도시의 노동자들을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사실주의적 경향이 짙게 내포된 작품입니다. 인상주의와의 연계성과는 별개로 카유보트만의 독자적인 작업세계가 재조명되기 시작한 것은 꽤나 후대에 이르러서입니다. 주지하듯 카유보트는 자신의 작품들을 판매하지 않았으나 1960년대에 이르러 후손들이 그의 그림들을 미술시장에 내놓기 시작합니다. 이를 통해 19세기 후반 시끌벅적하고 화려한 근대도시 파리의 이면을 이지적인 시선으로 묘사했던 그의 작품들이 늦게나마 사람들의 이목을 사로잡게 된 것이죠.
도시의 정서
나폴레옹 3세 시대 오스망 남작에 의한 도시 개발 사업은 근대 도시 파리를 탄생시켰습니다. 상하수도망이 확대되고 좁고 구불구불했던 중세의 길들이 넓고 곧은 포장대로로 변모하였으며, 거리에는 백화점과 카페, 오페라 극장 등 현대적인 건물과 상점들이 가득 들어섰습니다. 샤를 보들레르는 "근대생활의 화가"라는 글에서 변화된 도시 속을 산책하며 새로운 풍광을 관조하는 이들을 가리켜 '플라뇌르(Flanuer)'라 칭했습니다. 카유보트의 작품들은 이런 플라뇌르의 시점을 전적으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말끔한 포장도로 위를 유유히 거닐거나, 높은 발코니 혹은 거대한 다리 위에 서서 곧고 길게 뻗은 직선대로를 응시하는 관찰자의 시선이 바로 그것이죠. 파리의 역동적이고 시끌벅적한 단면을 주로 묘사했던 여타의 인상주의자들과는 달리, 카유보트는 질서 정연하고 정형화된 대도시로 변화된 파리의 외형을 보다 즐겨 그렸습니다. 그러나 카유보트의 시선에 포착된 도시의 풍광에는 왜인지 적막과 고독감이 함께 서려있기도 합니다. 회색조 위주의 모노톤의 색채가 이와 같은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키죠. 현재도 그렇지만 도시의 재개발 사업이란 언제나 명과 암의 양면성이 공존하기 마련입니다. 오스망 남작의 도시 개발 계획은 지금까지도 많은 관광객들이 사랑해 마지않는 국제 도시 파리의 외형을 완성시켰으나, 그 이면에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 고질적인 문제점들과 과거의 흔적들이 감추어져 있었죠. 번듯하지만 인공적인, 멀끔하지만 삭막한 이런 대도시의 정서를 그 시대의 카유보트 역시 감지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시선의 문제
인상주의 화가들이 아름다운 여성들을 즐겨 그렸던 것과는 달리 카유보트의 작품 속 주인공은 대부분이 남성들입니다. 육체노동의 현장이나 카누와 같은 스포츠 등 유독 남성성을 강조하는 장면들도 자주 다루었죠. 그러나 무엇보다 카유보트의 그림 속 남성들의 가장 주목할만한 특징은 바로 어딘가를 지긋이 응시하고 있는 그들의 시선입니다. 근현대 미술사에 있어 '시선'이라는 화두에 대해 논할 때 그의 작품들이 자주 거론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누드화를 비롯해 종래 그림 속 여인들은 관람의 대상으로서 어디까지나 피사체의 역할에 한정되어 있었습니다. 반면 여성들을 그리는 화면 밖 남성 화가는 능동적인 시선을 지닌 주체의 입장에 있습니다. "남성은 주체, 여성은 객체"라는 이분법적 사관이 19세기 후반 근대 사회에서는 여전히 지배적인 통념이었습니다. 나아가 시각과 이성이 등가적인 관계로 조망되면서, 남성은 이성적이고 여성은 감성적이라는 가치관 또한 만연하게 퍼져 있었지요. 이러한 이분법적인 사관에서 비롯한 남성의 시선, 즉 모든 것을 아우르듯 관망하는 주체의 시선을 카유보트는 자신의 화폭에 투사했던 것입니다. 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인식 속에 고착된 당대의 이념과 사상이 이렇듯 알게 모르게 이미지를 통해 발현되는 것, 그리고 그것을 파헤쳐 보는 재미가 바로 미술과 미술사가 지닌 진정한 묘미가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되는 카유보트의 작품들이었습니다.
-사진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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