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제도적 미술의 움직임
살롱전이라 불리는 프랑스의 '관전'은 태양왕 루이 14세의 집권 당시 설립된 미술학교 에콜 데 보자르(L‘Ecole des Beaux-Arts)의 졸업생들의 작품을 전시하기 위해 시작되었습니다. 살롱전은 향후 200년 동안 가장 권위 있는 미술제전으로 자리 잡았으며 1737년부터는 일반 대중들에게도 공개되기 시작했고, 파리에서 시행되는 유일한 공개 전람회였기에 금세 프랑스 국민 초미의 관심사로 부상하게 됩니다. 19세기 중반에 이르러서는 매년 100만여 명의 관람객들이 방문할 만큼 살롱전에 대한 프랑스 대중의 관심은 점차 높아져 갔습니다. 국민의 흥미가 고조될수록 심사위원들의 권위와 위상이 갈수록 하늘을 치솟은 것은 당연한 수순입니다. 대부분 보수적인 아카데미의 회원이었던 심사위원들은 자신들의 취향에 걸맞지 않은, 즉 정형화된 아카데미의 규범에 부합하지 않는 작품들은 예외 없이 낙선시키곤 했습니다. 독창적이거나 급진적인 경향을 보이는 작품들을 그들의 위상을 위협하는 것으로 간주했던 것이죠. 심지어 1863년 살롱전에 출사표를 내밀었던 5,000여 개의 작품 중 무려 3,000여 가량의 작품이 낙선되는 극단적인 사례가 발생하기도 하였고, 이처럼 공정성과 형평성이 결여된 심사위원들의 독단을 향한 화가들의 원성은 끝내 극에 달하게 됩니다. 이에 1863년 황제 나폴레옹 3세는 살롱전에서 낙선된 작품들을 따로 모아 전시를 할 수 있는 '낙선전'이라는 기가 막힌 대안을 간구합니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바로 이 낙선전을 통해 근대미술의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되는 화가들이 대거 등장하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무엇보다 후에 인상주의 그룹의 리더 격 인물이 되는 에두아르 마네(Edouard Manet)의 <풀밭 위의 점심>은 낙선전에 출품된 작품 중에서도 갖은 악평과 더불어 가장 많은 주목을 받았던 작품입니다. 나체의 여인들과 정장을 한 남성들이 함께 소풍을 즐기고 있는 기이한 장면을 묘사한 <풀밭 위의 점심>은 여인의 누드를 이상화하지 않고 외설적으로 표현했다는 측면에서, 그리고 기법적인 측면에서도 종래의 회화의 전통과 규율을 전혀 준수하지 않았다는 면에서도 엄청난 스캔들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담담한 표정을 한 채 관람자를 지긋이 바라보는 누드 여인의 시선이 대중과 평단을 향한 굉장한 도발로 여겨지기도 했죠. 그러나 마네의 작품이 야기한 숱한 논란과 급진성은 많은 젊은 화가들에게 회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해 주었습니다. 이처럼 예술의 새바람을 갈망하던 젊은 예술가들이 결집하여 1873년 보수적인 제도권 미술에 반기를 들며 '무명예술가협회'라는 그룹을 설립하였고, 이는 후에 등장하는 인상주의 그룹의 모태가 됩니다. 흥미롭게도 1874년부터 인상주의자들이 자신들만의 전시회를 개최하기 시작하자, 살롱전을 향한 대중의 관심은 급격히 시들해지기 시작합니다. 악평 일색이었던 평가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눈과 관심은 자연스레 새롭고 혁신적인 움직임을 향해 가고 있던 것입니다.
모더니즘과 근대회화의 태동
주지하듯 인상주의 화파의 구성원들은 반제도권 미술의 태동에 기반을 닦은 이들입니다. 19세기 후반 에두아르 마네,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Pierre Auguste Renoir)를 위시하여 프랑스 파리로부터 시작된 인상주의의 흐름은 궁극적으로 근대미술과 모더니즘의 시작으로 이어집니다. 무엇보다 찰나의 시각적 감각을 화폭에 담는 것을 목표로 했던 인상주의의 기치는 이전의 미술과 인상주의를 구분 짓는 가장 큰 획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이름이 시사하는 것처럼 인상주의 미술가들이 가장 중요시했던 것은 바로 '인상'입니다. 즉 대상에 대한 영속적인 본질이 아닌, 말 그대로 찰나의 순간적 인상을 구현하고자 했던 점이 그들의 가장 큰 목표였던 것이지요. 인상주의 화가들은 사물의 형상과 색채는 빛의 작용에 따라 시시각각 변화한다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서양미술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원근법의 전통을 과감히 버리고 견고한 윤곽선과 분명한 명암표현 또한 거부합니다. 대신 밝은 색채와 짧은 붓터치, 모자이크와 같은 점묘식 표현법을 구사하며 빛의 반사작용에 의해 일렁이는 대상의 표면을 그려내고자 했습니다. 나아가 인상주의 화가들은 기존의 파리 화단을 장악하고 있던 역사화와 같은 전통의 주제로부터 벗어나 주로 당대 파리의 생활상이나 풍경을 주제로 택했습니다. 그로 인해 자연스레 실내 스튜디오가 아닌 야외에서 거의 모든 작업들이 이루어졌습니다. 역설적이게도 인상주의라는 명칭은 인상주의의 대표주자 중 한 명인 모네의 작품을 조롱했던 한 비평가의 말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1874년 무명예술가협회에서 개최한 첫 번째 그룹전에 출품된 모네의 <인상, 해돋이>를 본 비평가 루이 르루아(Louis Leroy)가 그의 작업을 일컬어 "참으로 인상적"이라며 비꼬았던 경멸조의 조롱이 곧 그룹의 이름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지금이야 인상주의 작품들이 마치 고전으로 인식될 만큼 이상하게 느껴질 것이 없지만, 당시 그들의 회화는 아카데믹했던 파리 화단의 규범을 완전히 벗어나버린 파격 혹은 불경 그 자체로 여겨질 만큼 급진적인 움직임이었던 것입니다. 허나 인상주의가 근대회화의 시작으로 여겨지는 것은 비단 전통이나 관습으로부터의 과감한 단절을 선언했기 때문 만은 아닙니다. 그로부터 한 걸음 더 나아가 '빛' '순간' '감각' 등의 키워드로 치환되는 인상주의의 쟁점들이 그간 그림 안에 대상의 영속적인 본질을 고착화하고자 했던 회화의 목표를 근원적으로 전복시켰다는 혁신성에서 그 의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진출처
2.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5/54/Claude_Monet%2C_Impression%2C_soleil_levant.jpg/1542px-Claude_Monet%2C_Impression%2C_soleil_levant.jpg?20120111173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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